동아시아근대사 - 中國근대시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화보 작성 양무운동, 공친왕 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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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5-2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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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근대사 - 中國근대시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화보 작성 양무운동, 공친왕 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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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혁저가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함풍제다. 황상께서 만약 당신의 병이 깊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 아무 말 하시지 말고 그냥 바닥에 엎드려 울기만 하십시오라고 일러주었다. 함풍제는 혁흔을 공친왕에 봉했다.
다.
혁저는 사부가 일러주는 대로 실수 없이 행동했고 도광제는 매우 기뻐하며 혁저가 듬직하고 효성스럽다고 생각하여 그를 계승자로 결정했다. 그는 혁저에게 치국에 관한 식견이라면 황자께서는 혁흔 황자를 따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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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혁흔(奕訢). 호 낙도주인(樂道主人). 도광제(道光帝)의 여섯째 아들. 함풍제(咸豊帝)의 동생. 함풍제 즉위 뒤 공친왕에 봉해졌다.
두 황자도 부황의 소환이 대단히 중요한 관문이라는 사실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이 혁흔을 계승자로 선택하지 않은 도광제에게 짙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한편 혁저의 사부 두수전은 나랏일에 관한 것보다는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요령을 가르쳤다. 혁흔의 사부 탁병염은 황제가 군사에 관한 일을 물을 경우를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각자 사부에게 어떻게 하면 부친의 호감을 살 수 있는지 상의했다. 혁흔은 얼마 뒤 군기처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혁흔의 정치적 재능은 청나라 통치자들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北京]에 육박하여 함풍제가 러허[熱河]로 피난하자, 연합군과 절충하여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고 외교전담관서인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하여 열강과의 화친을 꾀하였다.
이름 혁흔(奕訢). 호 낙도주인(樂道主人). 도광제(道光帝)의 여섯째 아들. 함풍제(咸豊帝)의 동생. 함풍제 즉위 뒤 공친왕에 봉해졌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제2차 아편전쟁 초기에 혁흔은 서양과 싸워야 한다는 적극적인 주전파의 입장에 있었고, 1860년 11월에는 나랍씨(서태후)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함으로써 의정왕에 봉해졌다.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北京]에 육박하여 함풍제가 러허[熱河]로 피난하자, 연합군과 절충하여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고 외교전담관서인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하여 열강과의 화친을 꾀하였다.